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송호정전협정]] === 1932년 3월 3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상하이 사변이 주요 의제로 오르고 열강이 일본에 대해 강경해질 것을 예측한 외무성이 정전 성명을 발표함으로 열강의 분노를 억누르려 했다. 시게미쓰 공사는 3일 여명, 노무라 사령관에게 연락하여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일본은 정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무라 사령관의 의향은 어떠한가?"라고 문의했다. 이에 노무라 사령관은 "우리에 관한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육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대답했다. 시게미쓰 공사는 제네바와의 7시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임시총회 개최 이전에 정전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 육군과 상담을 거치지 않고 "일본군은 오늘날 상하이에서 전투를 치른 결과 출병의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즉시 전군에 대해 정전할 것을 결정하였다."라고 설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내외 통신사에 보도하게 했다. 시라카와 사령관 역시 정전에 사후 동의를 하였고 이로써 일본군의 공식적인 군사행동은 종결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이 완전히 근절되진 않았다. 한편 3월 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노르웨이, 멕시코, 그리스 대표 등이 잇달아 일본을 규탄했으며 대일 규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1932년 3월 4일 국제연맹 대회 결의안 1. 중일 양국 정부는 즉시 필요한 방법을 채택하여 양국 군사 당국이 정전 명령을 하도록 한다. 2. 상하이에 특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는 열강은 전항 방법의 실행 상태를 대회에 보고한다. 3. 중일 양국 대표는 상술한 열강의 육군, 해군, 무관 각 당국의 협조로 협상을 개시하여 방법을 정하도록 건의한다. 이 방법은 전쟁을 중지하고 일본 군대의 철수를 규정하는 것을 확정해야 한다. 본 대회는 상술한 열강들이 수시로 협상 상황을 보고하기를 희망한다.|| 3월 11일, 국제연맹은 3월 4일 결의안을 상기하며 일본 군대 철수 지역의 치안에 협조해달라고 열강에 요청하였으며 또한 19개국 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일 양국의 충돌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30일, 국제연맹은 다시 일본 군대 철수를 결의하였다. 결국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 양군의 철수가 결정되었으며 정전협상에 따라 5월 6일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 5월 31일 완전히 철수하였다. 외교부장 뤄원간은 협정 체결 이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시원치 않은 심정을 드러냈다. >"상하이 정전회의는 국제연맹의 결의안에 의거하여 소집된 것으로써 정전과 철수에 대한 협상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비밀 문건이나 구두 양해와 같은 것은 없었다. 상하이의 안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원탁회의가 개최된다면, 그 원탁회의에서 토론되어야 할 사항은 동북 지방의 만주사변을 포함한 모든 사항이 되어야 한다." 시원치 않은 결말에 난징 정부는 크나큰 국민적 저항에 부닥쳤다. 중국에서는 일본과 전면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국민당과 난징 정부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과 싸울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론의 요구는 무리한 점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